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로자 룩셈부르크 (문단 편집) === 공산당 창당 이전 === [[1871년]] [[프리비슬린스키|러시아 제국령 폴란드]] [[자모시치]]의 유복하고 교양 있는 [[아슈케나짐|아슈케나지 유대인]] 가정에서 로잘리아 룩센부르크(Rozalia Luxenburg)[* 이름은 [[장미]]라는 뜻인데, 기묘한 우연의 일치로 빨간 장미는 [[사회주의]] 운동의 상징이다.]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다섯 살 때 병을 얻어서 그때부터 [[다리(신체)|다리]] 길이가 서로 짝짝이로 달라져(혹은 엉덩이 통증으로) [[절름발이]]가 되었다. 이후 그녀의 가족은 [[바르샤바]]로 이주하게 되었으며, 그곳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그는 [[동유럽]] [[유대인]]스러운 [[세계시민주의]]에 깊게 영향을 받게 되며, 이는 그녀가 [[폴란드어]], [[러시아어]], [[독일어]], [[프랑스어]], [[영어]]와 [[이탈리아어]] 등 [[폴리글롯|6개 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했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이후 그는 그녀의 나이 15살에 [[유대인]] 혁명 서클과 폴란드 [[프롤레타리아]]당에 가입해 총파업 주도 등의 반정부 활동을 벌였으며, 이후에는 학업을 위해 유럽에서 유일하게 여성 입학을 허용하는 스위스 [[취리히 대학교]]으로 이주한다. [[취리히 대학교]] 철학부에 입학한 그녀는 이듬해 [[법학]]부로 전과해 국민 경제학과 공법학 등을 전공하면서 [[경제학]]에 대해서도 심도 있게 공부한다. 이외에 역사와 정치학 등에 대해서도 많은 공부를 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평생의 연인이자 동지가 될 [[레오 요기헤스]]를 만났고 본격적인 [[마르크스주의]]자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 1897년 그녀는 이후 폴란드의 산업발전(Die Industrielle Entwicklung Polens)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오늘날까지도 폴란드의 초기 산업화를 연구하는데 요긴하게 쓰이는 연구 자료다.], 1898년, 취리히에서부터 알고 지내던 독일 지인의 아들 '구스타프 뤼베크'와 위장 결혼하여 독일 시민권을 취득한 후, [[독일 사회민주당]]에 입당하여 1898년부터 제2차 [[인터내셔널]]에 참가하고 있던 [[독일 사회민주당]]에 입당한다. 이후 사민당의 좌파 노선에서 명성과 악명을 동시에 떨쳤다. 마침 당시 사민당의 중심 이론가인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이 중심으로 수정주의 논쟁이 펼쳐지고 있었는데 로자 룩셈부르크는 이를 비판하기 위해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를 저술한다. 이를 계기로 로자 룩셈부르크는 단번에 유명인사로 떠오른다. 그녀는 [[1905년]] [[피의 일요일 사건(러시아)|러시아 피의 일요일 시위]]에 참여하기 위해 바르샤바로 돌아가 폴란드 사회민주당을 창당하고 폴란드 사회주의 혁명을 이끌게 되는데, 이 당시 계급 투쟁보다는 반러시아 운동과 폴란드 독립을 먼저 주장하던 폴란드 [[공산주의자]]들과 충돌하게 된다. [[반국민주의|반국민주의자]]이자 국제주의자였던 그녀는 [[민족주의]]에 대해서 매우 민감하게 경계하였는데, 그녀는 민족주의가 민족이라는 거창한 미명하에 [[계급투쟁]]을 방해, 억압하거나 민족 간 또는 민족 국가 간의 이기주의를 부추겨 결국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우려는 이후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로 현실화된다. 폴란드 독립운동보다 계급 투쟁을 우선시한 그녀는 폴란드의 사회주의자들로부터 러시아 [[황제]]의 첩자라는 비난을 듣기도 하였으며, 이때 그녀는 러시아 경찰에 체포되어 구금되는 등, 본격 혁명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수감에서 풀려난 그녀는 이후 베를린으로 돌아와 사민당 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면서(1907~1914) '자본 축적론'을 집필하기도 한다. 그녀의 독자적 활동은 1914년에 더욱 본격화되는데, 1914년 로자 룩셈부르크는 대중 연설에서 [[군국주의]] 비판과 당시 [[독일 제국]] 황제이던 [[빌헬름 2세]]를 비판하였다는 죄목으로 투옥되지만 마침 군국주의에 회의적인 여론의 문제로 재판은 흐지부지 되고 풀려났다. 이후 [[전쟁]] 지속을 결의하는 [[독일 사회민주당]]을 떠나 '[[군국주의]]와 [[반군국주의]]'라는 [[책]]의 저자인 [[카를 리프크네히트]], [[클라라 체트킨]] 등과 함께 인터내셔널단(Die Internationale)을 결성하고, 로마 시대 노예 [[검투사]]의 반란을 일으켰던 [[스파르타쿠스]](Spartacus)의 이름을 따서 스파르타쿠스 연맹으로 개명한다. 스파르타쿠스 연맹은 혁명을 통해서 전쟁을 끝내고 프롤레타리아 정부를 세우는 것이 목적이었으며, 로자 룩셈부르크는 전쟁에 반대하는 총파업을 주도한 혐의로 1916년 카를 리프크네히트와 함께 체포되어 또 다시 2년 반 동안 투옥된다. 1917년 2월과 10월에 발생한 두 차례의 [[러시아 혁명]]을 감옥에서 맞은 그녀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환영하면서도, 혁명을 주도한 [[볼셰비키]]의 독재화를 우려했다. 1918년에 감옥에서 집필한 "러시아 혁명"(사후 1922년 출판)에서는 레닌과 트로츠키에게 경의를 표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볼셰비키의 권위주의적 독재와 부르주아 민주주의 억압, 민족주의적 태도 등을 비판하고, 혁명이 관료주의화되고, 부르주아적 독재로 귀착될 것에 대해 경고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